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항저우 만 상륙작전 ===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 예하 6사단과 18사단이 공중 엄호를 받으며 진산웨이(금산위)에 상륙했다. 중국군이 이들의 상륙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매우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 10군은 일본군 백만 항저우 만 상륙이란 애드벌룬까지 크게 띄우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했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일찍이 [[바이충시]]가 상하이를 포기하고 젝트 라인으로 철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바가 있으나 장제스는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중국군은 항저우만의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급파했으나 11월 8일 67군의 군장 우커런 중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렸다. 장제스와 중국군 3전구 지휘부는 11월 8일 야간에 상하이 방어군에게 방어선을 쑤저우-복산 라인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사실상 전국 퇴각 명령이었으나 이미 지치고 소모된 중국군은 너무 밀집된 상황이라 제대로 된 철수 계획도 없이 사실상 걸어 탈출해야 했기 때문에 큰 난관에 부닥쳤고 이때를 놓치지 않은 일본군의 맹공에 중국군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특히 항공 폭격을 집중적으로 받은 9집단군과 19집단군의 피해가 컸다. 거기에 일본군이 몰려온단 소식에 동요한 중국군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다.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백묘구)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했다.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